출처=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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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더디게 지나가는 탓일지도 모르지만, 주류 언론에서 비트코인을 금융위기의 결과물이라고 보도하는 행태를 보고 있자니 점점 힘이 든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다.

우선 비트코인이 금융위기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왜 사실이 아닌지 설명하고, 내가 왜 이 문제를 이토록 심각하게 여기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려 한다.

비트코인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 백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시점은 2007년 초로,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1년도 더 전이다.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은 붕괴하고 있었지만, 평생을 금융에 몸담아온 전문가들조차 그 정확한 규모를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다. 기업의 부도와 은행권 부실에 관한 내용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을 때도 사토시는 아마 백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가 조급하게 백서 작업을 서둘렀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토시가 비트코인 백서를 암호학 전문가들이 포함된 이메일 그룹에 돌린 것은 2008년 10월이었다. 당시 금융시장은 완전히 붕괴했고, 미국 정부는 금융 생태계의 일부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으며, 세계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낮추면서 돈을 찍어내고 있었다.

2009년 1월 사토시는 자신이 채굴한 최초의 비트코인 블록에 당일 더 타임즈가 보도한 주요 기사의 제목을 문구로 남겼다. “재무장관, 은행에 두번째 구제금융 임박(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이라는 문구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은 사토시가 금융위기에 대응해 비트코인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비트코인을 설계하기 위해 투입된 노력이나, P2P 금융과 관련해 아주 오랫동안 기반으로 쌓인 철학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역사의 중요성

이런 착각은 비트코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탈중앙화 방식의 전자화폐 솔루션을 개발하려고 고군분투해 온 암호학 전문가들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는 것으로,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다.

사토시가 대응하려 했던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그가 했던 일의 토대를 마련한 이들도 특정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계획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금융 자주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했다.

사토시가 비트코인 백서를 발행하기 전 금융 시스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첫번째 비트코인 블록이 채굴된 직후 사토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통적인 화폐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화폐의 가치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으리라는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법정화폐의 역사를 보면 그 신뢰가 무너진 경우가 너무 많다.”

사토시가 당시 어지러웠던 금융시장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다. 물론 금융위기의 여파는 매우 크고 무시하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사토시는 이를 뛰어넘는 더 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비트코인 블록에 남겨진 문구와 그 시점은 의도적일 수도,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메시지가 전달됐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사토시는 제도권 금융이 정치에 휘둘리는 현실을 고발하려 했다. 취약한 금융 구조와 제도적 금융 건전성에 대한 신뢰가 고갈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근본적으로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금융위기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기도 하지만, 금융위기는 비트코인 창시로 이어진 결정적 사건이 아닌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비트코인이 만들어진 이유는 금융위기 때문이 아니다. 금융위기는 비트코인 탄생의 밑바탕이 된 더 큰 문제의 한 가지 증상일 뿐이다. 비트코인이 금융위기에 대응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계속 살아남는다면, 비트코인은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솔루션 정도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트코인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해법이다.

비트코인을 금융위기라는 단일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고통스러운 조정 작업이 끝난 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필요성도 점점 사라지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은 호리병 안으로 다시 집어넣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의존하고 있는 금융 시스템에 내재한 취약점에 대한 인식도 한번 커지고 나면 결코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비트코인은 한때 비밀스러운 이메일 그룹의 구성원 사이에서만 오가던 아이디어들이 더 넓게 퍼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금융 권리, 개인 데이터, 그리고 자신의 정체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공교롭게도 비트코인이 탄생했던 시점의 상황은 이런 아이디어의 확산을 더욱 부추겼고, 최근 전통적인 통화정책이 외면받으면서 확산 속도가 또다시 빨라지고 있다. 금융 프라이버시, 몰수 불가능성, 법정화폐의 가치 저하 등은 암호화폐 시세가 출렁일 때마다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주제 중 일부다. 그리고 이제 이런 논의는 전통적 금융의 가장 신성한 영역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트코인을 특정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결과물로 볼 것이 아니라, 수십년 전 시작된 노력의 기술적인 성과로 바라봐야 한다. 아울러 아주 오래전부터 금융과 경제의 중앙화가 궁극적으로 불러올 미래를 예견했던 그 시절의 사상가들에게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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