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멈춰서고 나니, 그제야 이 세상을 굴리고, 끌고, 떠받쳐온 노동자들이 보인다."

 지난 3월, 이동제한 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일주일 치 먹을거리를 사러 장을 보러 가다가 맨하탄의 텅빈 대로를 홀로 달리던 버스를 보고 든 생각을 끄적여 놓은 구절이다. 도로에 차가 없어 배차 간격을 맞추기가 너무 쉬워졌는지, 버스는 파란불 신호를 한번 그냥 보내고 다시 출발했다.

 도시 밖에 별장이나 한동안 머물 데가 있는 이들은 일찌감치 뉴욕시를 떠나 재택근무로 전환한 뒤였다. 재택근무는 애초에 꿈도 꾸기 어려운 직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묵묵히 일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코로나19로 발생한 실업자가 수천만 명을 헤아리는데 그나마 일자리를 보전했으니 다행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필수적인 노동'을 하는 일터에서 충분한 거리두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노동 환경이, 미국 사회의 허술했던 방역 대책이 문제였다.

 일선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 그 의료진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 기관사, 버스 운전기사, 병원에서 나오는 의료 폐기물과 집에 있는 사람이 많아져 늘어난 생활 쓰레기를 처리하는 청소 노동자, 부쩍 늘어난 온라인 주문에 일손이 바빠진 물류 창고 노동자들은 언제 나도 감염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일터로 나갔다. 이른바 바이러스의 추적감시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은 증폭됐다. 하버드대 총장도, 부통령의 대변인도 코로나19에 걸렸지만, 그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감염됐는지 경로를 찾지 못했다.

 미국에 있을 땐 아무리 한국 뉴스를 봐도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출근을 하고 일상을 유지하는지, 심지어 온 국민이 날을 잡아 투표소를 찾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도 지역 감염을 억제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중순 한국에 와서 자가격리를 하면서 보니 좀 실감이 났다.

 한국 휴대폰을 개통하지 못해 번호가 없는데도 자가격리 앱을 통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재난 문자가 왔다. 시차에 적응이 안 돼 대낮에 서너 시간씩 낮잠을 잤는데, 그때마다 일정 시간 휴대폰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아 담당 공무원에게 보고됐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가 머무는 지역에 확진자가 나오거나 다녀가면 동선은 물론이고, 인적사항을 포함한 공지가 쉼 없이 왔다. 확진자가 다녀간 곳만 알면 될 것 같은데, 굳이 확진자의 성별과 나이, 때로는 직업까지 공개한 메시지가 차곡차곡 쌓였다.

'이태원 클럽발 감염' 이후 한국 방역 당국은 5차, 6차, 7차까지 감염 경로를 파악해 관리하는 행정력을 선보였다. 지난 5월10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녀간 서울 용산구의 한 클럽 근처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출처=김혜윤/한겨레
'이태원 클럽발 감염' 이후 한국 방역 당국은 5차, 6차, 7차까지 감염 경로를 파악해 관리하는 행정력을 선보였다. 지난 5월10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녀간 서울 용산구의 한 클럽 근처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출처=김혜윤/한겨레

 그러다 이른바 '이태원 클럽발 감염'이 발발했다.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5차, 6차, 7차까지 감염 경로를 파악해 관리하는 한국 보건 당국의 역량이었다. 뉴욕에서는 두 다리만 건너도 감염 경로가 오리무중이 되기 일쑤다. 한국이 코로나19를 지금껏 효과적으로 억제한 데 철저한 추적감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런데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이 우리 같은 기술이 없어서 추적감시를 하지 않은 걸까? 그보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또 다른 가치도 함께 고려해 전략을 세우다 보니, 추적감시를 안 하기로 했다는 분석이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국가 권력이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감시사회에 대한 거부감이 더 큰 여론의 지지를 받는 나라들은 추적감시를 시행하더라도 기술적으로 개인정보를 최대한 보호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방역과 개인정보 보호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 주장할 생각은 없다. 옳고 그름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치열한 토론을 통해 균형점을 찾아야 할 문제다.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이를 기술적으로, 정책적으로 시행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 이렇다"며, 필요한 토론을 생략하고 관성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태도 만큼은 피해야 한다.

 치료제와 백신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든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일이 최우선순위가 될 수 있다. 한국은 그 부분에서 분명 큰 성과를 냈다. 그러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방역을 이유로 개인정보를 제약 없이 들여다보고 취합한 국가 권력이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감시사회를 만들지 않도록 견제하는 일이 남았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아 개인정보를 별 의심 없이 중앙의 권력에 양도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겐 훨씬 어려운 과제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데 선발, 중간 투수뿐 아니라 마무리투수까지 너무 일찍 등판 시켜 불펜이 텅 빈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9회까지 게임을 끌어갈 계획을, 코로나19 이후 정부가 시민을 감시하지 못하게 하는 대책을 지금부터 세워야 한다.

 한 가지만. 여기서 정부는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 착한 권력과 나쁜 권력으로 구분할 수 없다. 중앙에 집중된 권력이 개인정보를 어디까지 마음껏 들여다보고 활용할 수 있느냐, 아니면 반대로 개인정보를 정부가 아닌 당사자 본인이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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