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태권

 

<유크로니아호 미국 입국 2년 전>



R은는 한 번도 깎지 않은 수염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자동차를 타고 다섯 시간을 걸려서 도착한 곳은 산 속이었다. 컴퓨터 장비들이 완벽하게 구비된 DL연구소였다. 거기에는 과거에 손발을 맞춰온 다양한 IT기술 전문가들과 다른 일꾼들이 모여 있었다. 최신 시설로 반짝거리는 건물 안에서 그 동안의 서로의 성과를 나누는 모두의 얼굴은 조금씩 상기되어갔다.

-이 기술들이 다 성공적으로 적용된다고 해도, 모든게 무산될 수 있어. 저번처럼.

C가 말했다.

-이번엔 다를거야. 우리도 이젠 그들이 장기를 어떻게 두는지 아니까.

-현실은 장기판이 아니야.

4시간에 걸친 토론은 싸움처럼 심각해지고있었다. 누군가가 와인을 한 병 가져왔다.

-모두 너무 예민해진 것 같은데. 좀 쉬면서 하자고.

의아한 얼굴을 한 이들이 회의실 안에서 서로를 보았다. 모두들 쉬는게 뭔지 잊은지 꽤 오래됐기 때문이었다.

-좋아. 한 잔 하면서 음악이나 듣지. 누가… 아니, 내가 할게.

민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 그를 보았다. 쉴틈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가 그런 말을 하니 너무나 안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회의실 안에 저음의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어두운 밤, 불이 환한 연구소 전체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대적할 수 없는 상대와 싸우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참고
용기 있는 자들도 포기해버린 길을 가고
불의를 바로 세우고
멀리서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아무리 지쳐도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팔을 뻗으리라.
이 영광스러운 길을 따라가야지만 죽을 때 내 마음에 평화가 오리니

To dream the impossible dream
To fight the unbeatable foe
To bear with unbearable sorrow
To run where the brave dare not go
To right the unrightable wrong
To love, pure and chaste, from a far
To try, when your arms are too weary
To reach the unreachable star!
This is my quest to follow that star
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To fight for the right without question of pause,
To be willing to march into hell
For a heavenly cause!
And I know, if I'll only be true to this glorious quest
That my heart will lie peaceful and calm, when I'm laid to my rest

 - The Impossible Dream(The Quest) - 프랭크 시나트라


 

따스하지만 비장한 목소리였다.

-나도 좀 줘.

R이 말했다. 민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아무래도 우린 좀 미친 것 같다.

C가 와인을 콜라처럼 들이키며 말했다.

 

-좀이 아니라 매우 그렇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R이 웃었다.

-난 아니야. 낌새 이상하면 곧 뜰거야.

C가 말했다.

-좋을대로. 하지만 계약대로 중간에 뜨면 토큰도 끝이야.

민이 말했다.

-저 노래 누구 버전이야? 앨비스?

C가 딴청을 했다.

-프랭크.

민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미 가장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을 당해봤던 민이었다.기득권의 꼼수에 넘어간 그 배신을 떠올리는 순간이면 숨도 못 쉬고 곧바로 죽기라도 할 정도로 흉통이 심해졌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 트라우마였다.

배신은 다시 있어서는 안됐다. 이번에는 달랐다. C가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조치를 취할 거였다.

-프랭크가 오늘, 날 울리네.

커다란 곰같은 외모에 안 어울리게 감성적인 R이 탁상에 고개를 묻고 약간 훌쩍거렸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R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민이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자 다른 이들은 와인과 함께 논의를  이어갔다.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무슨 딴 생각이야?

누군가가 민에게 물었다.

-아무 생각도 안했는데?

민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었다.

-넌 거짓말 하면 얼굴에 다 나타나. 여자냐?

C가 물었다.

민은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은 거짓말하면 얼굴에 나타나요’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꺼진 핸드폰에 와인때문에 붉어진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혼합현실 게임월드라는 플랫폼을 떠올리게 해준 마리였다.

-건배나 하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해준 마리를 위해서.

민의 말에 모두놀랐다.

-마리를 위하여

민이 잔을 높이 들었다.

-미쳤어요?

누군가가 민에게 말했다.

-복수심이 중요하긴 하지. 오 마리 부대표가 대표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C가 말했다. 오 마리는 한민을 추락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연인이었다. 일반에 알려지기는 코인다단계 사기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블록체인 거래소와 부대표 사이의 해킹 공조로 의심되었다. 다양한 컨센서스 알고리즘을 이용해서 여러 기업들이 쉽게 쓸 수 있는 한민 대표의 블록체인 플랫폼 백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다는 인정을 받았고, 실제로 완벽하게 동작하는 PoC(Proof of Concept) 제품을 여러 기업에서 사용하는 수준까지 구현하고 테스트까지 완료한 프로젝트였다.

그런 높은 수준의 신뢰를 바탕으로 암호화폐공개(Initial Coin Offering, ICO)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그의 노력은 코인 다단계 사기가 되어 버렸다. 암호화폐공개를 진행한 세계 최고의 암호화폐거래소에서 투자자들이 투자하고 생성한 코인들이 해킹을 통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피해규모가 컸기에 해킹을 당한 거래소는 문을 닫았고, 최종 책임은 고스란히 한 민 대표에게로 넘어왔다. 그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암호화폐공개(ICO)를 며칠 간 연기하고, 사건이 발생한 이후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암호화폐거래소의 일부 직원들과 오 마리 부대표가 벌인 짓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찾을 방법도 ...


-마리를 위해서.

모두들 부대표 마리를 떠올리며 찡그리며 복수를 건배했다. 한민은 굳이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주문한 것이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이 조합된 게임이라는 것을 잘도 알아냈군?

민이 말했다.

-사실 거기서 좀 갈등은 했어.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던 은어들이 아니었으니 … 갑자기 즐거움이라니 말이야. 근데, 거기서 굉장히 단순히 생각을 했지. 민이 즐거워할 것은 정말 재미있는 게임 밖에 더 있겠어? 하고 말이야. 그리고 넌 언제나 현실과 가상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세계가 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고 이야기하곤 했지. 그럼 답은 뻔하겠지?

R이 대답했다.

-너한텐 뻔하겠지만 시장반응은 항상 뻔하지 않으니까 벌써부터 안심하지 마. 갈길이 멀어. 왜 그래?

민이 말하는 도중에 B가 민을 러너대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안돼 .난 3D 시험운영은 안 하겠어. 3D영화도 못 봐. 어지러워서.

-이봐 모범생. 걱정 마. 죽지는 않을테니까. 만약 지금 안 올라가면 넌 내 손에 죽을 거야. 이거 만드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B가 민을 러너로 밀어넣었다.

-맙소사. 이거 뭐야?

민은 처음으로 혼합현실 안경을 써보더니 벗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이 괜찮지?

-진짜... 같아. 도대체 어떻게 한거야?

가상현실 공간과 민의 눈 앞의 진짜 공간이 혼합되고 있었다. 기존에 민이 쓰던 증강현실 안경은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가벼운 정보나 그래픽을 조금 보여주는 정도였지, 이렇게 진짜 같지는 않았다. 물론 퍼스트가 해킹을 통해 메시지를 보여주었을 때에는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한 건지 얘기해 줄까? 3박 4일 걸릴텐데. 나야 좋지. 그러니까…….

-부탁인데 잠시 조용히 해줘.

민은 다시 안경을 썼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몸이 우주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가상현실 안에서 그는 우주를 날고 있는 3D 영상을 보고 있었고 팔다리에 장착된 보조기구들이 그의 몸을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R은 우주를 날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우주 공간이 주변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매칭이 되어서 필요하면 현실세계에서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강력한 가상현실 공간으로의 몰입이 좋다면 온전히 가상현실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결정하면 되고, 현실 공간에서 다른 것을 보면서 날고 싶다면 증강현실 세계로 진입하면 되었다. 마치 2개의 다른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 앞에서 글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유크로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 사람의 꿈은 꿈일 뿐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입니다. 누구의 꿈을 함께 꾸시겠습니까?

여러 행성들이 간판을 빛내고 있었다. 행성들은 크로니아라고 불렸다. 중세의 도시처럼 생긴 행성도 있었고, 첨단 미래의 도시, 60년대 도시, 원시림으로 보이는 행성도 보였다.

광고판 두 개가 민의 어깨를 토닥거리더니 지나갔다.

‘반지의 제왕의 미들어스 크로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동맹군이 필요합니다.’, ‘시크릿 센세이션 크로니아에서 화끈하게 즐기실래요?’

-광고 좀 꺼봐.

민이 말했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좋아서 돌아 버리기 직전이야. 더 퍼스트에게 말해. 시험 운영은 끝났다고 …

 

<다음 주에 계속>

<지난화 보기>

4화_민이 낸 수수께끼를 풀어라

3화_살아남은 자들의 아침

2화_더 퍼스트의 속삭임

1화_유크로니아국의 입국 신청

 


 


윤여경


‘세 개의 시간’ 한낙원 과학 소설상 (2016)
‘러브 모노레일’ 황금가지 공모전 우수상 (2014)
한국SF협회 부회장 및 아시아SF협회 창립자

중국 최대 SF출판사 '과환세계', 'FAA', '스토리컴' 및 인도SF협회, 일본 SF작가협회, 남아시아 유명 작가 등을 섭외하여 아시아SF협회를 설립했다. (2018년 5월 19일 베이징 APSFCon) 아시아 SF연구 교류, 세계SF컨벤션에 한국SF작가들을 대동하여 홍보하는 등 국제교류에도 힘쓰고 있으며, 해외출간, 과학소설 VR 웹툰화 및 영화화 추진, 인공지능 작곡 과학소설 OST 등 OSMU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정지훈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선임강의교수
빅뱅엔젤스 매니징파트너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파트너
코인데스크 코리아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석사는 사회과학 계열의 보건정책관리학, 박사는 공학계열의 의공학 등 서로 다른 학문을 넘나드는 국내의 대표적 융합전도사. <거의 모든 IT의 역사>,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내 아이가 만날 미래> 등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와 미래에 대한 많은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SF영화의 장면들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국책과제도 수행하였고, 이와 관련한 주제의 외국서적인 <스타워즈에서 미래 사용자를 예측하라>를 번역하였으며, 대학에서도 이와 관련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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