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영국 브리스톨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4월부터 유튜브에서 비트코인 백서 강독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강독’이다. 직접 우리말로 번역한 비트코인 백서를 교재 삼아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설명한다. 그의 한글 번역판은 최근 비트코인 백서 공식 깃허브(Github) 저장소에도 올라갔다.


2008년 나온 비트코인 백서는 A4 용지 9장 분량, 초록(abstract)까지 포함해 13개 챕터로 구성돼 있다. 정 교수는 한 번에 한 챕터씩 강의를 한다. 현재 3장, ‘타임스탬프 서버’까지 왔다. 때로는 영어로 5줄에 불과한 내용을 20분에 걸쳐 필기를 해가며 설명한다. 행간의 의미까지 모조리 알려주겠다는 기세다.


왜 이런 강의를 하게 된 걸까. 마침 카이스트에서 초청한 블록체인 세미나 등 여러 세미나와 학회 참석 차 한국에 온 그를 지난주에 만났다. 만나기 전 검색을 통해 그의 이력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사토시 나카모토?'


정 교수는 포스텍(옛 포항공대)을 졸업했다. 포스텍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별로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전기공학,컴퓨터공학, 수학 등 3개 전공에 부전공으로 산업경영공학까지 마쳤다면, 게다가 과 수석으로 졸업했다면 얘기가 다르다. 3개 전공이 당시 포스텍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기에 여러 일간지에 그의 졸업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렇게 3개의 학사학위를 받은 뒤 그는 포스텍에서 수학,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경제학과 통계학 등 3개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는 스탠포드에서 경영공학으로 1개만 받았다. 앞으로 박사학위도 3개를 채울지 모를 일이다.


안랩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며 정보보안분야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에는 AOL (American OnLine)에서 연구인턴(Research Internship)을 했다. 온라인 광고 분야를 연구했다.


박사를 마치고 나서는 페이스북에서 이코노미스트(New Faculty Fellow Economist)로 1년 동안 있었다. 페이스북이 보유한 방대한 데이터를 마음껏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자리다.(미국 기업들은 이런 식으로 학술활동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정 교수는 해당 기간 동안 페이스북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광고 옥션에 대한 연구를 했고, 미국 특허도 2건이나 신청했다. 페이스북에서 일하는 동안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해커톤에 참여해 자선 경매에 대한 아이디어로 finalist까지 올랐다.

“제 이력을 보면, 블록체인에 관심을 안 갖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요?”

그렇다. 이런 학업과 현장 이력을 가진 사람이 블록체인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누가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오히려 왜 이제서야 블록체인 강의를 하게 됐는지가 더 적절한 질문일 것이다.


사실 정 교수는 공개적으로 비트코인 백서 강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스팀잇에 암호화폐에 대한 글을 익명으로 쓰기도 했다. 지나치게 불균형적인 지분구조로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래’ (많은지분을 보유한 세력을 일컫는 은어)들의 존재, 고래들의 전방위적인 매물정리 작전으로 의심되는 거래 패턴(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현재로선 해당 글이 쓰여진 시점이 올해 전반적인 하락추세의 시작이 되었다), 마진거래가 허용되는 해외 암호화폐 거래소들의 불투명한 운영구조 등에 대한 글을 통해 무분별한 암호화폐 투자/투기에 대한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과열에 대해서 경고하면서도 하락의 방향에 투자(쇼트)하는 것 역시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가 인상적이었다.


“올해 초까지 암호화폐 가격이 너무 오르면서 투기과열이 심각했다.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투기열풍이 꺼질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다. 가격이 어느정도 안정되고 시장이 잠잠해진 지금이 블록체인 기술 자체에 대한 학술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정 교수는 일부러 암호화폐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스팀잇에 쓴 글에 대한 보상으로 얻는 소액의 스팀달러가 그가 보유한 암호화폐의 전부다. 투자가 강의의 객관성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경제학에서 정 교수의 세부전공은 ‘마켓 디자인, 메커니즘 디자인’이다. 그 중에서도 옥션, 즉 경매가 주요 연구 분야다. 메커니즘 디자인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참여자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분야의 기초를 다진 레오니드 후르비치(Leonid Hurwicz), 에릭 매스킨(Eric Maskin), 로저 마이어슨(Roger Myerson) 3명이 2007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수상했다. 마켓 디자인과 메커니즘 디자인은 유사한 점이 많은데, 메커니즘 디자인이 주로 이론적인 연구에 집중하는 데 반해 마켓 디자인은 현실적인 연구에 집중한다. 어떤 메커니즘도 바람직한 지표를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마켓디자인은 해당 마켓에서 중요시 되어야 할 지표와 사용하면 좋은 현실적인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앨빈 로스(Alvin Roth)와 로이드 섀플리(Lloyd Shapley)가 마켓 디자인으로 2012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수상했다.


블록체인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곤 하는 작업 증명, 지분증명 등의 합의 메커니즘이 바로 경제학의 메커니즘 디자인/마켓 디자인에서 다루는 영역이다. 채굴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컴퓨팅 파워를 제공하고, 이를 이용해 전체 네트워크의 운영과 보안을 해결하는 비트코인은 이론적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현실에서는 나름대로 잘 작동하는 잘 설계된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블록체인으로 인해 메커니즘 디자인/마켓 디자인을 연구할 수 있는 또다른 큰 마켓이 열렸다. 전공자로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아직은 암호경제학이란 말이 경제학계에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지만, 최근 전산학을 넘어 경제학계에서도 비트코인이 제목에 등장하는 논문이 심심찮게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학과 컴퓨터공학의 융합연구로 급성장하고 있는 ACM Economics and Computation의 올해 학회에 전형적인 학술 연구자라고 보는 힘든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키노트 스피커 중 한명으로 초청된 것 역시 학계의 본격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 교수에게 블록체인 강의는 일종의 ‘재능기부’ 활동이자 '취미활동'이다. 언젠가 사회공헌재단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그는 “블록체인이 미래를 바꿀 중요한 기술이라고 믿지만, 마치 블록체인이 만능의 기술인 양 과장된 정보가 너무 많다. 나 역시 부족함이 많지만 내 전공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비트코인 백서는 블록체인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스팀잇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강의를 해 나갈 계획이다. 아직은 캐릭터를 소개한 단계지만, 입문자용 블록체인 강의 시리즈 이름이기도 한 <울룩불룩 블록체인>으로 블록체인 웹툰도 그려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주로 유튜브와 스팀잇에 동영상 강의와 글을 올려온 정 교수는 앞으로 <코인데스크코리아>를 통해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날 계획이다.

“코인데스크코리아는 한겨레신문과 블록체인 글로벌 미디어 코인데스크가 함께 만든 매체라 믿음이 간다. 블록체인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정말 좋은 매체라고 본다. 코인데스크코리아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블록체인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을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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