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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핀다르 웡(Pindar Wong)은 홍콩 베리파이(VeriFi Ltd)의 회장이자 코인데스크의 자문위원이다. 일찌감치 인터넷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인 웡은 1993년, 홍콩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만들어 사업 허가를 받기도 했다. 오늘 소개하는 칼럼은 5월14~16일 뉴욕에서 열린 콘센서스 2018 콘퍼런스 참가자들에게만 배포된 '콘센서스 매거진'에 실렸던 글이다.


 

중국의 하와이로 불리는 하이난(海南)섬은 중국 정부가 관리하는 경제특구로 보복 관세를 비롯해 나라 간 무역에서 발생하는 온갖 갈등과 충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의 먹구름이 조금씩 끼기 시작하던 지난달, 시진핑 중국 주석이 자유무역이 주는 혜택을 강조하며 현재 세계무역 질서를 옹호하는 연설을 한 장소도 바로 하이난섬이었다. (장기 집권의 길을 닦은) 중국의 지도자를 둘러싼 평가와는 별개로 시 주석의 연설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전 세계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그런데 오늘은 시진핑 주석이 전 세계 무역 질서에 미치는 영향력 자체가 곧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오늘 살펴볼 변화는 국가 간 경제력의 차이와 권력 관계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훨씬 더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제조업의 근간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아는 국제 무역질서도 과거의 유물로 전락할 날이 머지않았다. 제조업과 관련해 많은 주목을 받는 3D 프린팅이나 사물인터넷을 접목한 물류 및 배송, 점점 늘어나는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기술 등을 보더라도 변화의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무역에 관한 한 이 모든 기술의 화룡점정은 블록체인 기술이 될 것이다. 공동의 장부와 기록을 디지털상에서 검증할 수 있기에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상대방과도 거래할 수 있게 되는 혁신의 바탕에는 블록체인 기술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치를 주고받고 그에 따라 값을 치르는 방식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한 새로운 플랫폼으로 대체될 것이다. 새로운 플랫폼은 현재 세계무역기구(WTO)가 이른바 "원산지 기준" 원칙에 따라 관장하는 무역 질서로는 절대 관리할 수 없다.

무역 전쟁은 이제는 싸울 필요도 없다는 의미에서 '한물간 싸움'이 되어버렸다. 각국 정부는 WTO 체제에서 무역으로 인해 발생한 공장 해외 이전이나 그로 인한 노사 갈등 같은 문제에 발목 잡혀있을 것이 아니라, '신뢰를 쌓는 데 연연하지 않고 블록체인으로 검증하면 그만인' 블록체인 기반 무역 질서를 서둘러 구축하는 데 힘을 쏟는 편이 낫다. 이는 궁극적으로 무역 당사국끼리 마찰을 줄이고 관계를 개선하며 양쪽 사회에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로드맵이 있을까? 지난 2016년 말 (필자를 포함한) 홍콩의 이 분야 전문가, 전략가, 사업가들이 모여 이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중국 정부가 내세운 이른바 일대일로(一帶一路, Belt and Road Initiative) 전략에 포함되는 65개 남짓한 국가들을 아우르는 무역 질서를 온전히 디지털상에서 관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궁리하고 토론을 거듭해 왔다.

시간이 흘러 우리 모임에 '일대일로 블록체인 컨소시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대일로 블록체인 컨소시엄은 앞으로 공급망 관리 자체가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도로 자동화되면 자연히 블록체인이 제공하는 투명성, 불변성,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기능의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검증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검증이 유효하다는 것


이미 월마트나 IBM, 머스크(Maersk) 등 다양한 분야의 대기업들이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공급망 관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프루브넌스(Provenance), 스쿠체인(Skuchain) 등 유망한 스타트업들은 공급망 관리 업계가 원하는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우리 컨소시엄이 보기에 블록체인 기반 무역 질서를 전 세계적으로 널리 구축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두 개 있다. 첫 번째는 현재 이른바 QR코드로 처리하는 검증 작업을 블록체인으로 진행할 때 과연 이 과정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와 법적으로 책임 소재를 어떻게 할지(verifiability)의 문제다. 두 번째는 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에 기록한 데이터를 믿을 수 있는지, 어떻게 그 데이터가 맞는 데이터인지 검증할 것인지(validity)의 문제다. 특히 데이터에 오류가 있을 때가 문제인데, 이런 데이터를 이 글에서는 가짜 데이터(#FakeData)라고 부르겠다.

인터넷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법적인 검증 가능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고할 만한 사례가 나온다. 블록체인 주소가 맞는지 검증하는 작업은 초기에 나라별로 다른 인터넷 도메인 이름을 서로 확인하고 보증해주던 것과 개념상 비슷한 면이 있다. 즉, 인터넷에 도메인 이름 시스템(DNS)이 있는 것처럼 이른바 블록체인 이름 서비스(BNS, Blockchain Naming Service)가 필요하다. 블록체인 이름 서비스는 각 회사를 비롯해 블록체인을 이용하는 이들이 신원을 등록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을 뜻한다.

이 모델에 따라 구축한 시스템에서는 예를 들어 코인데스크(coindesk.com)가 등록해 운영하는 비트코인 지갑이 다른 누구도 아닌 미국 회사 코인데스크(CoinDesk LLC)가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는 지갑이라는 사실을 누구든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다.

가짜 데이터를 가려내는 문제에 관해서는 금융 분야에서 보안을 강화하고자 만든 오래된 규정이기도 한 고객 파악제도(KYC, know-your-customer)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즉, 사물인터넷과 블록체인을 결합한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러 기기의 하드웨어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검증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 고객 파악제도에 빗대어 기계 파악제도(KYM, know your machine)라고 부르겠다.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분쟁의 원인은 블록체인과 무관할 때가 많지만, 블록체인은 많은 논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데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기본적인 증거와 근거를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싼 비용으로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전략 관련국을 아우르는 블록체인 기반 지배구조를 구축하려면 무엇보다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사법상 관할 구역이 있어야 한다. 홍콩은 그 후보지로서 손색이 없다. 인터넷을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쓸 수 있고, 보통법 전통을 따르며, 민간이 주도하는 경제와 공적 영역에서 규칙을 정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절차가 정착돼 있다.

일대일로 블록체인 컨소시엄은 홍콩 사법 당국이 관할하는 지역 안에서 온라인상의 분쟁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해결하는 공개 원칙을 세움으로써 이른바 '검증 가능성과 데이터 타당성 확인(verifiability and validity)'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홍콩 전자 거래 규정(553조)을 통해 검증에 따르는 책임 소재를 법적으로 분명히 할 수 있다.

이미 도메인 이름에 관해 전 세계적으로 분쟁을 방지하고 공통의 원칙을 집행하는 인터넷주소관리기구 ICANN(Internet Corporation of Assigned Names and Numbers)이라는 단체가 있다. 일대일로 블록체인 컨소시엄은 이 기구에서 영감을 받아 이렇게 참여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고, 공개적이며 상향식으로 운영되는 방식을 제안하게 됐다. 블록체인 환경에서 공유하는 데이터를 관련 업계의 모든 참여자가 신뢰할 수 있도록 데이터의 타당성을 보증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지난해 중국 선전(深圳)에서 발족한 글로벌 스마트 컨테이너 연맹(Global Smart Container Alliance)의 사례를 참조할 만하다. 스마트 컨테이너 연맹이 주력한 작업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주변의 선적 화물과 화물 상태를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공통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통관용 전자잠금장치(E-locks)를 개발해 컨테이너를 네트워크상에서 원격으로 조종해 더 빨리 통관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2016년 3월부터 홍콩과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 세관에서 사용된 이 통관용 전자잠금장치는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확실한 암호 기술을 바탕으로 법적인 안전장치가 마련된다고 온라인상의 분쟁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분쟁은 여전히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이 훨씬 간소화됨으로써 해결 비용도 훨씬 줄어든다. 많은 기업이 이를 환영할 만하다.

수요 중심의 제조업과 무역 질서를 향하여


세계 제조업과 무역 질서의 바탕에 블록체인이 도입되면 이는 자연히 현재의 일방적인 공급망("push" supply chains)이 수요 중심의 반응형 주문제작 방식("pull" demand chains)으로 바뀌는 데 일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수요 중심 방식이란 소비자가 무엇을 원할지 제조사가 예상해 생산한 제품을 무조건 밀어 넣고 떠먹여 주는 방식이 아니라 제품의 생산을 고객의 수요에 맞춰, 고객이 원하면 그때 제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지금 미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무역 분쟁 자체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

여기서 블록체인이 기여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가치가 이동하면서 가격이 정해지고 참여자들이 이를 사고파는 긴 가치의 사슬(value chains)은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에서 잘게 나누어진다. 그리고 잘게 나눈 가치 사슬을 다시 이어주는 것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거래다. 블록체인이 모든 가치의 이동과 그에 따른 거래를 관장함으로써 유동성은 높아지고, 가격은 각각의 가치를 더 정밀하게 반영해 형성되며 필요에 따라 가치와 가격을 주고받는 거래도 더 늘어날 것이다.

나는 이를 "위험을 패킷으로 나누는 작업"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암호화된 증거를 바탕으로 해당 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한 이들의 기여도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잘게 나눈 보상을 알아서 정확히 지급할 수 있게 된다.

지난 2016년 한진해운이 파산했을 때 일어난 상황을 되돌아보면 이런 블록체인 기반 모델을 적용해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즉, 당시 파산한 한진해운의 화물선을 채권자들이 담보로 잡고 압류하면서 배에 실린 화물들도 꼼짝없이 정박해 있었다. 이때 만약 선적한 제품의 가치와 가격이 블록체인에 기록돼 있었다면, 제품을 받고 대금을 치를 예정이었던 당사자가 블록체인에 토큰을 지급하고 제품을 인도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치 사슬의 어떤 지점에서라도 거래가 막혔을 때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교환하려는 가치와 치러야 할 가격을 아주 잘게 쪼개 거래하게 함으로써 수많은 공급자가 수요를 함께 채우는 방식으로 거래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유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은 마치 전자상거래에서 소비자의 주문을 먼저 모아 게시하면 이를 보고 제작자들이 조건에 따라 물건을 마련하는 수요 중심 방식과 같다.

수요 중심 가치 사슬에서 제조업은 "주문과 함께 제작하는" 제조 방식을 따른다. 물량보다도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성을 구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식의 제조 방식이 무역 질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3D 프린팅과 사물인터넷이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게 된 상황을 가정해보자. 축구화를 만드는 회사에 급한 견적 요청이 들어온다. 다음 달 열리는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이 신어야 할 축구화를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다. 견적을 내고 거래가 성사돼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도안 제작과 생산에 들어간다. 축구화 디자인은 새로운 제조업 관련 지적재산권을 가진 중국에서 맡지만, 도안대로 축구화를 만들어 찍어내는 건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믿을 만한 3D 프린터 업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어느 정도 팔 수 있을지 판매량을 예측하기 어렵거나 수요가 들쭉날쭉할 때 특히 이러한 주문형 제작 방식이 상당히 쓸모가 있다. 대신 재료나 원료를 수급하는 과정 등 공급망 어딘가에서 차질이 빚어지면 제작 과정 전체가 중단돼 재고가 쉽게 바닥날 수 있다는 점은 취약점으로 꼽힌다. 미래의 수요 중심 방식으로 제조업이 재편되더라도 재고가 바닥나는 것은 모든 제조업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위험을 패킷으로 나누고, 점점 검증된 기기를 활용하는 공급자가 늘어나면 언젠가 수요 중심의 블록체인 기반 제조 방식이 전통적인 신뢰의 한계를 넘어 거래의 신뢰 지형 자체를 새로 바꿀 것이다. 디지털 중심의 무역 질서에서는 비용을 산출하던 기존 공식은 물론 무역의 경제학 자체가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다. 수요 중심 방식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점은 전자상거래가 예전에는 물류창고에 직접 부품을 쌓아둬야 하던 것을 컴퓨터상의 장부에만 기록하고 옮기게 되니 보관 비용이 훨씬 줄어들면서 성공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수요 중심 제조업에서는 수없이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리한 전략이 된다. 여기에는 모든 제조 과정이 컴퓨터로 자동화돼 진행되고, 필요할 때마다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확충해 규모를 확장한다는 전제가 뒷받침된다. 거래가 성사돼 값을 치르는 동시에 주문에 들어가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수요 중심 방식이 수익을 내는 데 더 유리한 점도 있다. 먼저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측에서는 제조 비용을 미리 받는 셈이다. 또한, 판매 수요를 실시간으로 전달받기 때문에 만일에 대비해 일단 재고를 잔뜩 채워놓고 보던 시절에 흔히 나타나던 채찍 효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채찍 효과는 수요를 부풀려 예측해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물건을 생산하게 되는 문제를 일컫는 말인데, 결과적으로는 공급망 전체에 걸쳐 물자를 낭비하고 팔지 못하는 재고가 쌓인다. 수요 중심 방식에서 공급자들이 받아보는 수요는 예측한 수치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실제 주문이므로 팔지 못할 물건을 생산해 재고가 쌓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위험을 패킷으로 나눈 수요 중심 제조 방식을 적시 납품(just-in-time manufacturing)이 한 단계 진화한 형태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생산에 들어가는 방식에 자동으로 결제까지 진행되는 이른바 적시 수금(just-in-time financing) 방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대금을 중간에 누군가 가로채거나 결제가 밀리지 않으면서 생산자가 자동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건 블록체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요 중심 방식은 환경 보호에도 이바지한다. 역물류(reverse logistics)라는 개념은 반품과 재사용, 재활용을 포함해 생산부터 소비, 폐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수요 중심 주문형 제작 방식으로 만든 제품은 저마다 각각 다른 특징이 있다. 그래서 중고 제품이라도 거래 장터가 형성되면 나눠 쓰고 다시 쓰고 바꿔 쓰는 일이 활성화될 수 있어 환경 보호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소위 순환 경제가 자리를 잡고 지구에 한정된 자원을 훨씬 효율적으로 쓰게 돼 환경도 보호할 수 있다. 순환 경제에서는 첫 판매뿐 아니라 이후 주인이 바뀌어 다시 쓰이는 용도까지 고려해 물건의 가격이 책정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이른바 '계획적 구식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불리는 제조업계의 관행을 없애는 데도 블록체인이 이바지할 수 있다. 계획적 구식화란 새로 출시하는 제품을 더 많이 팔고자 전에 팔았던 제품을 아직 멀쩡히 쓸 수 있는데도 기술적으로 뒤처지게 만들거나 유행을 일으켜 예전 제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뜻한다. 수요 중심 제조 방식이 정착되면 제조업체들은 환경에 부담을 주는 계획적 구식화를 벗어던지고 아예 처음부터 값싸고 오래가는 튼튼한 제품을 만들어 팔 수 있다. 또한, 소비자들이 원하면 소비자들로부터 물건을 되사 자체 브랜드 재활용 장터를 만들어 운영할 수도 있다.

2017년부터 유럽에서는 계획적 구식화를 폐기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유럽 국가들은 누군가 쓸 수 있는 물건은 계속해서 버리지 말고 쓰도록 장려하고 있다. 수요 중심의 블록체인 기반 모델에 토큰으로 직접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면 계획적 구식화란 개념을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무역이란 곧 무형 자산의 교환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통용되는 디지털 자산의 종류만 벌써 1만 개를 넘었다. 수많은 무형 자산(intangible property, IP)을 거래하는 시장의 역할을 이미 암호화폐 거래소가 하는 셈이다. (무형 자산의 줄임말을 'IP'로 쓴 데는 이유가 있다. 흔히 'IP' 하면 지적 재산(intellectual property)을 가리키는데, 대부분 암호화폐 기술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 재산보다는 무형 자산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제 이러한 새로운 무형 자산 거래에 3D 프린팅을 비롯한 인더스트리 4.0 제조 기술을 접목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여기서 "배송되는" 것은 실제 물건이 아니라 디지털 설계도와 제품 도안이다. 도안을 제작한 원작자가 누구인지는 블록체인의 기록을 따라가면 정확히 알 수 있어 물건값을 치르면 된다. ascribe.io가 좋은 예다.

블록체인이 곧 시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물건을 만들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물건을 판)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수요 중심 방식에서는 주문과 함께 결제가 이뤄지기 때문에 블록체인이 자동으로 수금 업무를 해주는 셈이다. 단순히 수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나 콘텐츠 생산에 기여한 만큼 정해진 원칙에 따라 공동 제작자들에게 사용료나 판매 대금을 정확히 지급하는 일까지 블록체인이 해주기 때문에 창작 업무에 보상을 지급하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평가도 있다. MIT의 프레마 시리크리슈나 연구원은 이를 인터넷 프로토콜에 따라 움직이는 지적 재산이라는 뜻에서 "IP over IP"라고 불렀다. 즉, 공급이 시장의 수요에 발맞춰 움직인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컨테이너에 공산품을 비롯한 유형 자산을 싣고 대양을 가르는 화물선이 곧 무역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면, 이제는 컴퓨터 데이터 속 패킷에 담긴 무형 자산이 곧 무역이 된 것이다. 이는 국제무역 질서의 근간을 뒤흔들 만한 변화다.

블록체인을 통한 새로운 무역 질서가 정립되면 현재 세계무역기구의 원산지 규정을 어떻게 적용할지, 또 각 나라가 희토류와 같은 자원을 계속해서 전략적으로 비축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기존 세계무역기구 질서 하에서 무역 협상은 기본적으로 몇 년씩 질질 끌다 소득 없이 종료되기 일쑤였다. 현행 규정과 무역 질서가 과연 제조부터 무역, 거래까지 모든 것이 디지털로만 이뤄지는 새로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하물며 스마트 컨테이너가 물류를 자동화하고, 제품이 가장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는 시장을 알아서 찾아가는 세상이 오면 지금의 질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새로운 무역 질서 패러다임에서 제조 과정이나 비용을 여러 나라에서 나누어 지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나라와 나라 사이에 발생하던 무역 분쟁도 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오히려 디지털 혁신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클 것이다. 이미 디지털 자동화는 전 세계 노동시장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으며 앞으로 우리의 삶도 자동화에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정책결정자들이 이러한 기술 혁신이 가져오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로 인해 시장 구조와 경쟁의 양상이 변하는 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때 진짜 위기가 올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의주시하며 준비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소리소문없이 들이닥치곤 한다. 블록체인 기술의 도래가 그러했다. 각국 정부는 항상 눈과 귀를 열고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을 보면 여전히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남아있다. 홍콩은 그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기 좋은 새우 같은 신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기가 고조될수록 세계 무역질서를 좌우하는 양강인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가 극적인 대타협을 이뤄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들이 블록체인 기반 무역 질서를 구축해 무형 자산을 거래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원칙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공동의 이익을 규정해나간다면 결코 이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무역 전쟁이냐 대타협이냐, 둘 중에 어쨌든 무역 전쟁은 피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극적으로 변하고 있는 경제 구조를 고려할 때 무역 전쟁을 벌여봤자 별로 바뀔 게 없을뿐더러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물간 무역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소리소문없이 다가오고 있는, 아니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 변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라 부탁하고 싶다.

번역: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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